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잭 더 리퍼 (문단 편집) === 다섯 번째 사건: 1888년 11월 9일 === 1888년 11월 9일, 메리 제인 켈리(Mary Jane Kelly, 25세)라는 매춘부가 자신의 거주지인 도르셋 가 밀러스 코트에서 살해당했다.[* 이 거리는 듀발 스트리트(Duval Street)로 개칭되었다가 재개발되어 현재는 Old Spitalfields Market이라는 시장의 일부가 되었다.][* 우연인지, 범인이 노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날은 [[빅토리아 여왕]]의 장남이자 다음 왕인 [[에드워드 7세]]의 생일이다.] 참고로, 도르셋 가는 [[런던]] 내 최악의 우범지대 중 하나였다. 잭 더 리퍼 때문에 켈리도 불안감에 한동안 계속 집에 있었으나 돈이 궁했던 데다가 때마침 6주 동안 밀려 있던 집세 29실링이 있어서 다시 매춘을 하다가 집에서 살해당했다.[* 켈리가 살았던 밀러스 코트 13번지는 요즘으로 말하면 원룸텔 내지는 [[고시원]] 같은 곳이었다. 3명이 들어가면 꽉 차는 정도의 넓이의 방에 가구는 탁자에 의자, 난로와 침대가 전부였다. 당시 하층민의 생활 수준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켈리의 이웃이었던 매춘부 메리 앤 콕스의 증언에 의하면 "켈리가 살해되기 전 날인 11월 8일 밤 23시 45분 경 켈리가 35 ~ 36세 정도의 키가 5피트 5인치의 남성과 같이 집으로 들어왔고, 1시 경까지 계속 노래를 불러댔다"고 한다. 오전 12시 30분 켈리 근처에 살던 꽃장수 캐서린 피켓 부인은 켈리의 노래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남편은 캐서린 피켓 부인이 이에 불평하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려는 것을 "불쌍한 여자를 그냥 내버려 두세요"라고 말하면서 막았다. 오전 1시 켈리의 윗방에 살던[* 밀러스 코트 13번지 2층. 켈리는 1층에서 살았다.] 엘리자베스 프레이터는 밀러스 코트 입구에서 30분 가량 서있다가 집으로 돌아갔는데 이때 프레이터는 노랫소리를 듣지 못했고 아무도 밀러스 코트를 드나들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켈리의 노래가 1시 30분에 그쳤고 이때 켈리는 외출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전 2시경 플라워 앤 딘 스트리트에서 커머셜 거리 하숙집 거주자인 조지 허친슨은 6펜스만 빌려달라 요구하는 켈리를 마주쳤다. 마침 허친슨은 롬포드에서 막 돌아왔기에 돈이 없었고 결국 켈리는 스웰 스트리트 방향으로 되돌아가 걸어갔다. 콕스는 "3시 경에 켈리의 방에서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고, 빛도 새어나오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4시 경 프레이터는 자신이 기르던 [[고양이]]가 자신의 목을 밟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났고 직후 "살인이야!" 하는 비명을 들었지만 그런 외침은 이스트 엔드 지역에서는 흔했기 때문에 무시했다고 한다. 같은 시간 밀러스 코트에서 친구들과 함께 지내던 사라 루이스도 그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프레이터는 5시 45분 경에 누군가 밀러스 코트를 빠져나가는 소리를 들었지만 당시에는 별 의심을 하지 않았었다. 오전 10시 45분 토마스 보우어(Thomas Bowyer)는 고용주 존 매카시(John McCarthy)의 지시에 따라 켈리에게서 6주 동안 밀린 집세 29실링을 받기 위해 켈리의 방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는데 아무 대답이 없어서 깨진 창문 틈으로 방 안을 들여다 보았더니 처참하게 난도질당한 채 침대에 누운 켈리의 시신이 있었다. 켈리의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살점이 잘려나갔고[* 얼굴 훼손이 심하여 켈리의 동거인이자 애인이었던 조세프 바넷(Joseph Barnett, 이 사람을 사건의 범인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이 눈과 귀, 머리 색으로 간신히 신원확인을 해 줄 수 있었을 정도엮다.] 오른쪽 대퇴부와 두 유방이 모두 잘려나갔으며 뱃속의 자궁, 신장, 간, 내장, [[비장]][* 순우리말로는 '지라'라고 한다. 횡격막의 아래, 왼쪽 콩팥의 위, 위의 왼쪽에 있는 길이 10~12cm, 너비 6~8cm, 무게 80~150g의 [[콩팥]]처럼 생긴 장기다. 일종의 림프절이며 신체 내 림프절 중 가장 크다. 신체 내 약 10%이상의 [[혈액]]을 보유하고 있다. 생김새도 거의 피주머니에 가깝다.] 등이 적출되어 주변에 널렸을 뿐만 아니라 [[심장]]은 사라져서 찾을 수조차 없었다.[* 당시 켈리가 [[임신]]해 있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으나 공식 [[부검]] 결과와 [[의사]] 토머스 본드(Thomas Bond)의 현장 검시 문건에 의하면 임신에 대한 언급은 없다.] 앞서 잭 더 리퍼에게 살해당한 다른 4명의 시신도 심하게 훼손되었지만 켈리는 특히 그 훼손 정도가 심각했는데 이는 범인이 실외가 아닌 실내에서 홀로 작업할 시간이 충분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오전 8시 30분 캐롤라인 맥스웰이라는 여자는 이때 켈리를 보았다고 주장했는데 켈리와 자신의 의상을 심도 있게 설명했고 켈리를 잘 알지 못한다는 점은 인정했으나 날짜는 틀리지 않았다고 단호하게 진술했다. 범행 시간은 토머스 본드(Thomas Bond)[* 영국의 외과의사. 세계 최초의 [[프로파일러]] 중 한 명으로 불린다.[[https://en.wikipedia.org/wiki/Offender_profiling|영어 위키백과 문서]]]의 추정 결과 새벽 2시에서 8시 사이였고 두 번째 피해자인 채프먼을 검시한 적 있는 조지 백스터는 '적어도 이 훼손이 2시간은 걸렸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한편 오전 11시쯤 사건 현장에 도착한 경찰들은 2시간이 걸려서야 문을 부수고 켈리의 방으로 들어갔는데 이는 워런 경이 개들을 사건 현장에 투입하려면 아무도 이전에 사건 현장을 건드리지 말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일선 경찰들과 경찰국 간의 의사소통의 부재가 빚어낸 해프닝으로, 켈리가 살해되기 직전에 워런 경은 사임했으며 개들은 투입되지 않기로 되어 있었다. 결국 경찰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무능했다. 이후 모든 영국 국민들이 공포를 넘어 분노했고 [[빅토리아 여왕]]은 '반드시 그를 잡으라.'는 어명까지 내렸다.[* 참고로 11월 9일은 [[빅토리아 여왕]]의 바로 다음 후계자인 [[에드워드 7세]]의 생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끝내 붙잡히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